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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디김 회식이 있던 그날은 근처에서 뜨개질 모임이라도 끝났던 건지, 뜨개실로 가득한 보따리를 잔뜩 든 아주머니들의 무리가 파도치듯이 지나갔다. 골목 중간에 어정쩡하게 멈춰 선 주은의 팔을 잡아 가볍게 당겨준 건 과장님이었다. 말수가 적고 다른 동료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 과장님, 점심을 혼자 먹는 과장님, 체취에 향수와 낙엽 쌓인 건조한 가을 오후의 냄새가 섞여 나던 과장님, 300여 명의 직원 가운데 유일하게 미국 출신인 랜디김 과장님. 과장님의 손이 스르륵 풀렸다. 과장님의 손가락이 주은의 손목까지 가볍게 스쳤다. 실크 스카프 하나가 스치는 듯한, 부드럽고 간지러운 느낌이 났다. 과장님이 골목 벽을 가리켰다. 두 사람은 나란히 벽에 기대어 섰고, 과장님은 말없이 담배를 주은에게 권했다. 주은이 담배 연기를 조.. 2022. 11. 22.
「아이디어 블록」중에서 ▒ 명사와 동사의 선택에 집중하라. 글이 분명해진다. ▒ 하루에 몇 페이지나 쓰는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연필 1번부터 7번까지 번호를 매겨놓고 그중 두 자루 정도 닳아 없어져야 하루 일을 했다 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반면, 우리 시대 작가인 폴 오스터는 천천히 쓰는 편이다. 하루에 한 페이지라도 심혈을 기울여 썼다면 만족해한다. 매일 쓰는 양을 정해놓는 작가도 있다. 범죄 소설 작가 엘모어 레너드는 하루에 6~8페이지를 써야 일어난다. 톰 울프는 꼬박 10페이지를 쓴다. 톰은 "강제로 써야 좋은 글도 나온다."라고 말한다. 강제로 써라. 일단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하면 2,500단어가 될 때까지 무조건 써라.(보통 A4용지 한 장에 250 단어가 들어간다) 마지막 페이지를 끝낼 때까지 수정하지 마.. 2022. 8. 11.
아이디어 블록 1 - 엉망이었던 입사 면접에 대해 이야기 해볼 것. "토익 점수가 아주 높으시네요." "감사합니다." (너무 겸손했나? 늘 그 정도는 나온다고 자신 있게 말했어야 했나?) "그런데 집이 좀 머시네요." "되면 출퇴근이야 해야죠." (야! 그 모양으로 대답하면 어떡해. 아무리 멀고 힘들어도 합격만 시켜주시면 열심히 다니겠다거나, 아니면 직주근접을 지향하기에 가까이 이사를 오겠다고 했어야지. 너 이런 식으로 굴면 떨어져.) 그녀의 예상은 적중했다. 떨어졌다. 어차피 그 회사가 있는 강남으로 이사 갈 돈 같은 건 없었다. 거긴 반지하도 비싼 동네겠지. 하지만 그녀는 두더지처럼, 토끼처럼 땅 속에 살고 싶지는 않았다. 이만큼 살아보니 견딜 수 없다는 결론이 들었다. (지금 세 번째로 반지하에 세들어 살고 있는 그녀였다.) 그녀는 옥탑을 선호했다. 2년 단위로 반.. 2022. 8. 11.
나의 여행 - 최영미 거리에서 여행가방만 봐도 떠나고 싶어 세계지도를 펼치면 거기쯤에 있을 것 같아 내가 떠나온 고향이 흥분의 지퍼를 밀고 당기고 가방 속에 아침과 저녁이 들어왔다, 나갔다 자면서도 계산기를 두드리다 그날이 다가오면 이미 진이 빠져 터미널에 내려 무서운 자유의 광풍이 불면 전 생애를 끌고 어그적 어그적, 하룻밤 잘 곳을 찾아 다음날 아침에는 지도를 보며 새로운 도시를 정복할 구두의 끈을 단단히 조였다 길을 잃어본 자만이 다시 시작할 수 있다 2022. 8. 9.
「지구 끝의 온실」중에서 ▒ 낡은 차가 덜컹거리며 오르막 흙길 앞에 멈춰 섰다. p9 ▒ 그는 어둠 속에서 도망치는 우리를 향해 총을 여러 발 쏘았다. 그러면서 울부짖는 들개처럼 악을 질렀다. p128 ▒ 하지만 돌핀이 폐허를 빠져나왔을 때, 아마라가 조종 장치를 붙잡은 채 울기 시작했으므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죽은 사람들의 얼굴을 기억하려고 했다. 그들이 내게 해준 말도 기억하려고 했다. 아무것에도 마음 붙이지 말고 그냥 어디로든 도망치라고, 그러다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그땐 정말로 죽는 거라고. 마지막으로 그 이름들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타티야나, 마오, 스테이시, 그리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언젠가는 다 잊어버릴 이름들이었다. p135 ▒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물기 어린 공기였다. 세찬 .. 2022. 8. 1.
수정얼음 - 정해종 황홀하지? 그대에게 출렁이는 남극의 황금빛 일몰을 보여주고 미끄러지듯 그대의 목구멍을 타고 흘러 뜨거운 그 무엇이 역류할 때, 죽여주지? 온더락스 유리욕조에 투명한 알몸 담그고 쇼걸처럼, 내 비록 그대 눈 앞에서 몸 흔들고 있지만 내 속살의 투명함이 유리잔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걸 내 속의 투명한 뜨거움이 알콜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걸 뜨거움 속에 도사리고 있는 나의 독기가 취기와 다르다는 걸, 그대는 모를걸 내가 먼 빙하기로부터 흘러왔다는 사실도 어차피 밀실의 운명이지만, 인기척 없는 깊은 계속 쩡쩡 얼어붙은 빙판아래 잠든 열목어 새끼들을 깨우고 그 여리고 여린 것들과 흐르고 싶었던 순정한 꿈들이 이따금씩 그대의 어금니 사이에서 으드득 으드득 씹혀진다는 것도, 그대는 모를걸 정말 모를걸 2022. 6.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