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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디김

by 꿈의 페달을 밟고 2022. 11. 22.

  회식이 있던 그날은 근처에서 뜨개질 모임이라도 끝났던 건지, 뜨개실로 가득한 보따리를 잔뜩 든 아주머니들의 무리가 파도치듯이 지나갔다. 골목 중간에 어정쩡하게 멈춰 선 주은의 팔을 잡아 가볍게 당겨준 건 과장님이었다. 말수가 적고 다른 동료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 과장님, 점심을 혼자 먹는 과장님, 체취에 향수와 낙엽 쌓인 건조한 가을 오후의 냄새가 섞여 나던 과장님, 300여 명의 직원 가운데 유일하게 미국 출신인 랜디김 과장님.

  과장님의 손이 스르륵 풀렸다. 과장님의 손가락이 주은의 손목까지 가볍게 스쳤다. 실크 스카프 하나가 스치는 듯한, 부드럽고 간지러운 느낌이 났다. 과장님이 골목 벽을 가리켰다. 두 사람은 나란히 벽에 기대어 섰고, 과장님은 말없이 담배를 주은에게 권했다. 주은이 담배 연기를 조용히 내뱉을 즈음 과장님은 자기의 담배에 불을 붙이고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주은이 과장님을 쳐다보았다. 달을 보던 과장님의 목울대가 올라갔다 내려왔다. 목이라도 메였던 걸까. 주은도 과장님을 따라 달을 올려다보았다.

  “회식 자리 불편하시죠?”

  주은의 물음에 과장님은 담배 연기를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흘려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노란 가로등 아래로 연기가 피어올랐다. 연기가 꼭 만화책 속 말풍선 같다고 생각했다. 그랬더라면 자기 머리 위의 말풍선은 끝없는 질문과 말들로 들어차다가 터져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주은은 꾹 참고 조용히 미소 지으며 과장님을 바라보았다.

  가게 문틈으로 영업팀의 술자리 게임 소리가 새 나왔다. 이내 문이 활짝 열리더니 영업팀의 이 차장님이 나오셨다. 주은은 담배를 껐다.

  “아깝게 뭐하러 꺼. 그냥 피우지. 잡지사에 담배 피우는 여자 직원들이 하나둘도 아니고.”

  “아니에요. 이제 다시 들어가 보려고요.”

  “나 다 피운 다음에 같이 들어가자.”

  이 차장님이 과장님을 흘깃 바라보았다.

  회사에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은 그래도 몇몇 있었지만 영어는 없었다. 그래서 신규 라이선스 잡지를 창간하면서 급히 찾은 아르바이트생이 주은이었던 것이다. 주은은 창간 관련해서 작업할 일이 없으면 다른 부서에서 영어가 필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불려 갔는데, 덕분에 의도치 않게 회사의 여러 사람들과 두루 사이가 좋았다. 주은은 그저 아르바이트생일 뿐이었고 자기들의 일과 얽힐 일도 없었기 때문에 부서에 관계없이 모두 친절하게 대했다. 신기하게도 그들은 또 과장님 앞에선 매우 불편해했다. 언어도 언어지만 자기들과 묘하게 다른 분위기를 과장님이 어색했던 것 같았다. 주은은 다시 과장님 옆에 섰다. 주은도 이제는 과장님 전담 통역사처럼 받아들여지는 것이 익숙해졌다.

  “아, 근데 말이야, 주은 씨가 계속 옆에서 도와주지 않아야 김 과장도 한국말이 빨리 늘 텐데. 그래야 두루두루 친해질 수도 있고, 농담도 좀 편하게 주고받고 하는데. 아이고, 전화 왔네. 여보세요, 딸? 독서실이야? 어, 아빠도 곧 가”

  이 차장님은 입에 담배를 물고 한 손을 흔들며 골목 속으로 사라졌다.

  주은과 과장님 사이에 또다시 편안한 적막이 들어앉았다. 주은은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밤 10시였다. 실바람이 불어와 과장님의 손이 닿았던 부분을 간지럽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