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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다운 글쓰기 과제 7월 중순, 엄마는 하숙집을 열었다. 나는 엄마가 시킨 대로 달력을 그려 방문마다 붙였다. 같이 놀 친구가 있나, 붓글씨와 독서가 취미이던 엄마가 붓과 책 대신 종일 고무장갑 아니면 걸레만 쥐고 있으니 가만히 있을 수가 있나. 이왕 하는 김에 엄마가 좋아하는 파란색 A4지 위에 흰색 펜으로 달력을 그려서 방마다 붙였다. 점심식사에 참석하는 날에는 동그라미를, 그렇지 않은 날에는 아무 표시도 하지 말라고 써두었지만 대학생 언니오빠들은 동그라미를 그린 날에도 갑자기 일이 생겼다며 나가버리거나 동그라미를 그리지 않은 날에도 표시한다는 걸 깜빡했다면서 등장했다. 여덟 명 모두 온 날도, 한 명도 안 온 날도 있었다. 8월이 되어도 언니오빠들은 변한 게 없었다. 복도에서 마주친 미대 언니 한 명은 “어머니 도와드.. 2023. 4. 18.
해삼이야기 각성했을 때, 몸속으로 무언가가 들어오고 있었다. 아주 작은, 건드리는 순간 파사사 하고 흩어지는 것들이었다. 몸의 가장 끝에 난 구멍에서 짧은 줄이 빠져나가 미끄덩하고 딱딱한 것에 묻어있는 것을 빨아들이면 신기하면서도 조금은 익숙한 느낌이 났다. 그 느낌이 좋았다. 다시 한번 느끼고 싶었다. 구멍으로 힘을 주었더니 더 많이 들어왔다. 조금 더 세게 했더니, 몸통이 끌리면서 따라왔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나는 그렇게 움직이는 방법을 익혔다. 소리도 없이 고요한 곳에서 나는 끝없이 먹었다. 앞구멍을 좀 더 다양하게 다룰 수 있게 됐고, 덕분에 훨씬 더 빨리 움직이는 즐거움도 누렸다. 열심히 먹고 움직이다 보면 앞구멍의 반대쪽 끝에 있는 뒷구멍에서는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먹었는지 보여주는 흔.. 2023. 4. 17.
병아리꽃 집에서 사람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건 풀냄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내가 어릴 때부터 희귀 식물을 모았는데, 희귀하다고만 하면 종류를 마다하지 않고 구해왔기 때문에 베란다는 식물원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한겨울에도 베란다에는 총천연색 꽃이 마구잡이로 피어나 눈을 어지럽혔다. 오빠 또한 결코 어머니와 아버지에 뒤지지 않았다. 오빠는 도대체 어디서 구해오는지 알 수도 없을 이끼류의 식물을 키웠다. 틈만 나면 분무기를 뿌리는 바람에 베란다 안의 공기는 언제나 축축했다. 오빠의 이끼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꽃들만큼이나 어지럽게 퍼져있었기에 베란다의 유리창과 벽, 마루로 통하는 유리문까지 오랫동안 청소를 하지 않은 수족관처럼 초록색으로 얼룩덜룩했다. 고등학교 입학을 앞뒀을 즈음, 친구를 데리고 집에 왔을 때가 생.. 2023. 4. 17.
전학생, 기억하세요 -세 번째 편지- 전학생은 잠이 많은 아이였습니다. 수업 시간에도 자고, 체육 시간에도 나가지 않고 잤지요. 심지어 시험 시간에도 잠이 들었습니다. 아무 때나, 아무 데서나 잠이 들었지요. 담임 선생님은 처음엔 전학생에게 관심을 보이시더니 시험 시간에도 자는 모습을 보고 혀를 끌끌 차시더니 답이 없는 아이라고 생각한 것 같았습니다. 전학생을 종종 교무실로 부르곤 하셨는데 시험 날 이후로 다시는 부르지 않으셨어요. 그 뒤로 몇 주 뒤에 전학생은 자퇴했습니다. 담임 선생님은 전학생은 조금 아파서 더는 학교를 다닐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허탈했지요. "조금 아픈" 전학생이 집에 찾아와 한 허황한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었으니 저 자신이 조금 어처구니없는 아이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전학생의 이야기가 진실.. 2022. 12. 1.
랜디김_모텔 과장님의 손가락이 의도치 않게 주은의 손가락에 닿았다. 그리고 주은은 조용히 숨을 내쉬며 과장님의 손가락을 살며시 잡았다. 과장님은 손을 빼지도 않았지만 주은의 손가락을 잡은 것도 아니었다. 과장님이 주은을 바라보았다. 주은이 고개를 돌리며 손을 빼려고 하자 과장님이 주은의 손가락을 잡았다. 두 사람이 그렇게 손을 잡고 얼마나 걸었는지 모르겠다. 주은은 과장님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러다가 맞은편에 오는 사람과 부딪힐 뻔할 적도 있었다. 그때 과장님은 주은을 자기 곁으로 잡아당겼고 마침 오른쪽에서 비쳐오는 중국 국수 식당의 붉은 간판 빛이 과장님의 매끈한 턱선 위에 내려앉았다. 주은은 팔짱을 낀 채로 턱에서 목까지 내려오는 선을 계속 올려다보았다. 한참을 그렇게 천천히 걷다가 과장님이 머뭇거렸다.. 2022. 11. 29.
랜디김 회식이 있던 그날은 근처에서 뜨개질 모임이라도 끝났던 건지, 뜨개실로 가득한 보따리를 잔뜩 든 아주머니들의 무리가 파도치듯이 지나갔다. 골목 중간에 어정쩡하게 멈춰 선 주은의 팔을 잡아 가볍게 당겨준 건 과장님이었다. 말수가 적고 다른 동료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 과장님, 점심을 혼자 먹는 과장님, 체취에 향수와 낙엽 쌓인 건조한 가을 오후의 냄새가 섞여 나던 과장님, 300여 명의 직원 가운데 유일하게 미국 출신인 랜디김 과장님. 과장님의 손이 스르륵 풀렸다. 과장님의 손가락이 주은의 손목까지 가볍게 스쳤다. 실크 스카프 하나가 스치는 듯한, 부드럽고 간지러운 느낌이 났다. 과장님이 골목 벽을 가리켰다. 두 사람은 나란히 벽에 기대어 섰고, 과장님은 말없이 담배를 주은에게 권했다. 주은이 담배 연기를 조.. 2022. 11.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