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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미4

나의 여행 - 최영미 거리에서 여행가방만 봐도 떠나고 싶어 세계지도를 펼치면 거기쯤에 있을 것 같아 내가 떠나온 고향이 흥분의 지퍼를 밀고 당기고 가방 속에 아침과 저녁이 들어왔다, 나갔다 자면서도 계산기를 두드리다 그날이 다가오면 이미 진이 빠져 터미널에 내려 무서운 자유의 광풍이 불면 전 생애를 끌고 어그적 어그적, 하룻밤 잘 곳을 찾아 다음날 아침에는 지도를 보며 새로운 도시를 정복할 구두의 끈을 단단히 조였다 길을 잃어본 자만이 다시 시작할 수 있다 2022. 8. 9.
茶와 同情 - 최영미 내 마음을 받아달라고 밑구녁까지 보이며 애원했건만 네가 준 것은 차와 동정뿐. 내 마음은 허겁지겁 미지근한 동정에도 입술을 데었고 너덜너덜 해진 자존심을 붙들고 오늘도 거울 앞에 섰다 봄이라고 개나리가 피었다 지는 줄도 모르고······ 2022. 5. 24.
인생 - 최영미 달리는 열차에 앉아 창 밖을 더듬노라면 가까운 나무들은 휙휙 형체도 없이 도망가고 먼 산만 오롯이 풍경으로 잡힌다 해바른 창가에 기대앉으면 겨울을 물리친 강둑에 아물아물 아지랑이 피어오르고 시간은 레일 위에 미끄러져 한 쌍의 팽팽한 선일 뿐인데 인생길도 그런 것인가 더듬으면 달음치고 돌아서면 잡히는 흔들리는 유리창 머리 묻고 생각해본다 바퀴소리 덜컹덜컹 총알처럼 가슴에 박히는데 그 속에 내가 있고 네가 있고 아직도 못다 한 우리의 시름이 있는 가까웠다 멀어지는 바깥세상은 졸리운 눈 속으로 얼키설키 감겨오는데 전선 위에 무심히 내려앉은 저걸, 하늘이라고 그러던가 2022. 4. 29.
꿈의 페달을 밟고 - 최영미 내 마음 저 달처럼 차오르는데 네가 쌓은 돌담을 넘지 못하고 새벽마다 유산되는 꿈을 찾아서 잡을 수 없는 손으로 너를 더듬고 말할 수 없는 혀로 너를 부른다 몰래 사랑을 키워온 밤이 깊어가는데 꿈의 페달을 밟고 너에게 갈 수 있다면 시시한 별들의 유혹은 뿌리쳐도 좋았다 2022. 4.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