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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나는대로 우울증 환자가 다른 우울증 환자의 자살 소식을 듣고 "전우가 죽는 느낌"이라고 자주 표현해서 그랬던 건지, 내가 하는 말의 맥락을 듣고 맞춘 건지 모르겠지만 정신과 의사는 내 말을 듣다가 "전우"를 콕 짚어 말했다. 일전에 남편의 후배의 사망 소식을 듣고 얼마나 울었던지, 얼마나 마음이 아팠던지, 얼마나 무서웠던지는 잘 알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도통 연결고리가 없는 그 사람의 사망 소식에 내가 왜 그렇게 슬퍼한지는 전혀 몰랐다. 그거였다. 전우의 사망. 그리고 그게 지금 내가 걱정스러운 이유인 듯하다. 나는 또 한 달치 약을 처방받아왔다. 가방에서 김중혁의 소설과 정신과약이 흔들거린다. 저 수십 알의 약을 삼켜야한다고 생각하니 일순간 지겨움이 몰려온다. 몇 달을 더 먹어야하는 걸까. 의사는 점점 올해를.. 2022. 5. 13.
辭尹白下 - 村女 溪路暮煙起 斜陽白鷺前 君家去漸遠 歸家不忍鞭 - 시골 여자 시냇가의 길에 오르는 저녁연기 해오라기 날으는 해질녘이다 떠나온 님의 집이 차츰 멀어가나니 돌아오는 말에 차마 채찍질 못한다 2022. 5. 10.
우연 우연히, 지나다 보니 가까이 있어서, 불쑥 한번 연락해봤는데 내가 마침 아무 일 없었더라. 그래서 만남이 성사되었더라, 하는. 나는 그런 우연을 언제나 마음 한구석에서 기다리고 있다. 내가 하고 싶기도 하고. 그래서 툭하면 b에게 퇴근했냐, 뭐하냐 물어보지만 정작 퇴근 시간의 서울에 뛰어들 용기가 선뜻 나지 않아 말만 꺼내고 만다. 20대에 본 게 마지막 인연이 오늘 불쑥 찾아와 곤히 자는 아가를 보여주고 갔다. (언니, 예전이랑 똑같다, 야, 너도 똑같아, 하는 말은 단언컨대 진심이다.) 고단하기로 손에 꼽히는 게 육아라는 걸 뻔히 아는 나도 잠든 아가 발바닥을 보면 괜스레 더 늦기 전에 둘째 한번 가져봐?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 ㅎㅎㅎ 우연이 찾아와 곱디 고운 것을 보여주고 갔다. 2022. 5. 2.
인생 - 최영미 달리는 열차에 앉아 창 밖을 더듬노라면 가까운 나무들은 휙휙 형체도 없이 도망가고 먼 산만 오롯이 풍경으로 잡힌다 해바른 창가에 기대앉으면 겨울을 물리친 강둑에 아물아물 아지랑이 피어오르고 시간은 레일 위에 미끄러져 한 쌍의 팽팽한 선일 뿐인데 인생길도 그런 것인가 더듬으면 달음치고 돌아서면 잡히는 흔들리는 유리창 머리 묻고 생각해본다 바퀴소리 덜컹덜컹 총알처럼 가슴에 박히는데 그 속에 내가 있고 네가 있고 아직도 못다 한 우리의 시름이 있는 가까웠다 멀어지는 바깥세상은 졸리운 눈 속으로 얼키설키 감겨오는데 전선 위에 무심히 내려앉은 저걸, 하늘이라고 그러던가 2022. 4. 29.
기다림 - 피천득 아빠는 유리창으로 살며시 들여다보았다 뒷머리 모습을 더듬어 아빠는 너를 금방 찾아냈다 너는 선생님을 쳐다보고 웃고 있었다 아빠는 운동장에서 종 칠 때를 기다렸다 2022. 4. 28.
기다리며 3시 50분부터 4시5분까지 15분간 난 마당에 나와 낮은 돌담에 앉는다. 내 취향에서 멀리 벗어난 모양의 돌담이지만 그래도 앉아서 단풍 보고, 내 떡갈이, 내 장미, 내 벚나무, 내 작약, 내 백합 바라볼 수 있다는 게 어디냐. 쏜 살 같이 지나가는 내 15분, 한가하고 행복하 어. 아이왔더! 2022. 4.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