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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대 - 심보선 나 다 자랐다, 삼십대, 청춘은 껌처럼 씹고 버렸다, 가끔 눈물이 흘렀으나 그것을 기적이라 믿지 않았다, 다만 깜짝 놀라 친구들에게 전화질이나 해댈 뿐, 뭐하고 사니, 산책은 나의 종교, 하품은 나의 기도문, 귀의할 곳이 있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지, 공원에 나가 사진도 찍고 김밥도 먹었다, 평화로웠으나, 삼십대, 평화가 그리 믿을 만한 것이겠나, 비행운에 할퀴운 하늘이 순식간에 아무는 것을 잔디밭에 누워 바라보았다, 내 속 어딘가에 고여 있는 하얀 피, 꿈속에, 니가 나타났다, 다음 날 꿈에도, 같은 자리에 니가 서 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너랑 닮은 새였다 (제발 날아가지 마), 삼십대, 다 자랐는데 왜 사나, 사랑은 여전히 오는가, 여전히 아픈가, 여전히 신열에 몸 들뜨나, 산책에서 돌아오.. 2022. 4. 27.
외로운 아들 - 마종기 1 아비는 코리아에서 대학을 나오고 스물 몇 살, 의학 연구랍시고 미국에 왔지. 결혼을 하고 행사처럼 네가 난 거지. 너는 송아지 노래도, 나비야 노래도 잘하더니 학교에 들어가자 일년도 못 되어 한국말을 끝내버렸어. 친구들 못 알아듣는 말에 한동안 당황해하더니.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중에 아비는 왔다갔다 한글 학교도 만들고 한글 교사를 초빙해 고개도 많이 숙였지만 너는 뜻도 모르고 읽고, 외마디 소리나 할 뿐, 네 할아버지가 쓰신 동화 한편은커녕 이 아비의 못난 시 한 줄도 이해 못 하면서 학교에서는 인기 있고 똑똑한 동양계 미국인. 고등학교 졸업 때는 이 아비도 자랑스러웠지. 천여 명 학생과 학부형의 극장 무대에서 졸업생 답사를 읽으면서 농담까지 지껄이고 난데없이 학교 밴드는 아리랑을.. 2022. 4. 26.
추신(追伸) - 홍성란 당신이 나를 보려고 본 게 아니라 다만 보이니까 바라본 것일지라도 나는 꼭 당신이 불러야 할 이름이었잖아요. 2022. 4. 25.
聖 찰리 채플린 - 황지우 영화 끝장면에서 우리의 "무죄한 희생자" 찰리 채플린이 길가에서 신발끈을 다시 묶으면서, 그리고 특유의 슬픈 얼굴로 씩 웃으면서 애인에게 "그렇지만 죽는다고는 말하지 마!" 하고 말할 때 너는 또 소갈머리 없이 울었지 내 거지 근성 때문인지도 몰라 나는 너의 그 말 한마디에 굶주려 있었단 말야; "너, 요즘 뭐 먹고 사냐?"고 물어주는 거 聖者는 거지들에게 그렇게 말하지; 너도 살어야 헐 것 아니냐 어떻게든 살어 있어라 2022. 4. 22.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 황인숙 비가 온다. 네게 말할 게 생겨서 기뻐. 비가 온다구! 나는 비가 되었어요. 나는 빗방울이 되었어요. 난 날개 달린 빗방울이 되었어요. 나는 신나게 날아가. 유리창을 열어둬. 네 이마에 부딪힐 거야. 네 눈썹에 부딪힐 거야. 너를 흠뻑 적실 거야. 유리창을 열어둬. 비가 온다구! 비가 온다구! 나의 소중한 이여.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2022. 4. 21.
꿈꾸는 누드 - 신현림 이 남자 저 남자 아니어도 착한 목동의 손을 가진 남자와 지냈으면 그가 내 낭군이면 그를 만났으면 좋겠어 호롱불의 누드를 더듬고 핥고 회오리바람처럼 엉키고 그게 엉켜 봤자라는 걸 알고 싶고 섹스보다도 섹스 후의 갓 빤 빨래 같은 잠이 준비하는 새 날 새 아침을 맞으며 베란다에서 새의 노랫소리를 듣고 승강이도 벌이면서 함께 숨 쉬고 일하고 당신을 만나 평화로운 양이 됐다고 고맙다고 삽십삼년을 기다렸다고 고백하겠어 2022. 4.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