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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여행 - 최영미 거리에서 여행가방만 봐도 떠나고 싶어 세계지도를 펼치면 거기쯤에 있을 것 같아 내가 떠나온 고향이 흥분의 지퍼를 밀고 당기고 가방 속에 아침과 저녁이 들어왔다, 나갔다 자면서도 계산기를 두드리다 그날이 다가오면 이미 진이 빠져 터미널에 내려 무서운 자유의 광풍이 불면 전 생애를 끌고 어그적 어그적, 하룻밤 잘 곳을 찾아 다음날 아침에는 지도를 보며 새로운 도시를 정복할 구두의 끈을 단단히 조였다 길을 잃어본 자만이 다시 시작할 수 있다 2022. 8. 9.
수정얼음 - 정해종 황홀하지? 그대에게 출렁이는 남극의 황금빛 일몰을 보여주고 미끄러지듯 그대의 목구멍을 타고 흘러 뜨거운 그 무엇이 역류할 때, 죽여주지? 온더락스 유리욕조에 투명한 알몸 담그고 쇼걸처럼, 내 비록 그대 눈 앞에서 몸 흔들고 있지만 내 속살의 투명함이 유리잔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걸 내 속의 투명한 뜨거움이 알콜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걸 뜨거움 속에 도사리고 있는 나의 독기가 취기와 다르다는 걸, 그대는 모를걸 내가 먼 빙하기로부터 흘러왔다는 사실도 어차피 밀실의 운명이지만, 인기척 없는 깊은 계속 쩡쩡 얼어붙은 빙판아래 잠든 열목어 새끼들을 깨우고 그 여리고 여린 것들과 흐르고 싶었던 순정한 꿈들이 이따금씩 그대의 어금니 사이에서 으드득 으드득 씹혀진다는 것도, 그대는 모를걸 정말 모를걸 2022. 6. 8.
茶와 同情 - 최영미 내 마음을 받아달라고 밑구녁까지 보이며 애원했건만 네가 준 것은 차와 동정뿐. 내 마음은 허겁지겁 미지근한 동정에도 입술을 데었고 너덜너덜 해진 자존심을 붙들고 오늘도 거울 앞에 섰다 봄이라고 개나리가 피었다 지는 줄도 모르고······ 2022. 5. 24.
돌아오는 길 - 홍성란 네가 감추려는 것 이미 알고 있으니 거짓말 안 해도 돼 그냥 믿어줄 테니 이것이 사는 법이라고 웃지 않고 웃었네 2022. 5. 23.
裸木 - 신경림 나무들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서서 하늘을 향해 길게 팔을 내뻗고 있다 밤이면 메마른 손 끝에 아름다운 별빛을 받아 드러낸 몸통에서 흙 속에 박은 뿌리까지 그것으로 말끔히 씻어내려는 것이겠지 터진 살갗에 새겨진 고달픈 삶이나 뒤틀린 허리에 배인 구질구질한 나날이야 부끄러울 것도 숨길 것도 없어 한밤에 내려 몸을 덮는 눈 따위 흔들어 시원스레 털어 다시 알몸이 되겠지만 알고 있을까 그들 때로 서로 부둥켜안고 온몸을 떨며 깊은 울음을 터뜨릴 때 멀리서 같이 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2022. 5. 17.
간이역 - 김선우 내 기억 속 아직 풋것인 사랑은 감꽃 내리던 날의 그애 함석집 마당가 주문을 걸듯 덮어놓은 고운 흙 가만 헤치면 속눈썹처럼 나타나던 좋 · 아 · 해 얼리꼴레 아이들 놀림에 고개 푹 숙이고 미안해ㅡ 흙글씨 새기던 당두마을 그애 마른 솔잎 냄새가 나던 이사오고 한번도 보지 못한 채 어느덧 나는 남자를 알고 귀향길에 때때로 소문만 듣던 그애 아버지 따라 태백으로 갔다는 공고를 자퇴하고 광부가 되었다는 급행열차로는 갈 수 없는 곳 그렇게 때로 간이역을 생각했다 사북 철암 황지 웅숭그린 역사마다 한그릇 우동에 손을 덥히면서 천천히 동쪽 바다에 닿아가는 완행열차 지금은 가리봉 어디 청공일 한다는 출생신고 못한 사내아이도 하나 있다는 내 추억의 간이역 삶이라든가 용접봉, 불꽃, 희망 따위 어린날 알지 못.. 2022. 5.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