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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아들

by 꿈의 페달을 밟고 2022. 4. 26.

- 마종기

 

 

                     1

아비는 코리아에서 대학을 나오고

스물 몇 살, 의학 연구랍시고 미국에 왔지.

결혼을 하고 행사처럼 네가 난 거지.

너는 송아지 노래도, 나비야 노래도 잘하더니

학교에 들어가자 일년도 못 되어 한국말을 끝내버렸어.

친구들 못 알아듣는 말에 한동안 당황해하더니.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중에

아비는 왔다갔다 한글 학교도 만들고

한글 교사를 초빙해 고개도 많이 숙였지만

너는 뜻도 모르고 읽고, 외마디 소리나 할 뿐,

네 할아버지가 쓰신 동화 한편은커녕

이 아비의 못난 시 한 줄도 이해 못 하면서

학교에서는 인기 있고 똑똑한 동양계 미국인.

 

고등학교 졸업 때는 이 아비도 자랑스러웠지.

천여 명 학생과 학부형의 극장 무대에서

졸업생 답사를 읽으면서 농담까지 지껄이고

난데없이 학교 밴드는 아리랑을 연주해주고

학부형들 몰려와 축하의 악수와 포옹을 할 때

처음으로 동양인이 이 학교의 일등이라는 말.

텔레비에도 며칠씩 나와 경사가 났다는 말.

 

                        2

그렇게 가보고 싶다던 네 뿌리의 고국 방문,

아비가 주선한 졸업 선물의 긴 여행이었지.

그 한철 고국에서 열심히 한글을 배우고

한국의 역사에도 흥미가 많아졌다며

자랑스럽게 처음 보는 고국에 감격해하더니

석 달 만에 너는 풀죽은 배추가 되어 돌아왔지.

얼굴의 상처보다 마음에 난 상처가 더 컸겠지.

데모의 뜻도 모르고 최루탄 연기만 피해다니다가

데모에 참석하지 않는 놈은 사내도 아니라고

자기 나라 말도 제대로 모르는 놈은 바보놈이라고

너만한 대학생에게 욕먹고 돌팔매를 맞은 후

멋쩍게 웃는 네 외로움을 어떻게 달랠 수 있겠니.

 

민중의 노동자가 아니면 매판 자본가가 쉽게 되는 시대,

돌팔매질에 앞장서야 광이 나는 한 판과

최루탄 수없이 쏘아대는 딴 극단의 한 판,

그 사이에 보이는 어려운 방정식의 날들을,

고국의 어려운 곡예의 높이를 내가 뭘 알겠니.

너는 그래서 속한 곳이 없는 것을 알게 되었지,

때때로 자랑스럽고 좋아서 미치는 조국,

미우면 돌팔매질하고 눈물도 흘리는 조국,

그런 감정의 조국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구나.

대학에 가서는 동양계 학생과 더욱 친해지고

숨어서는 한글 교과서를 열심히 읽는 얼굴,

아비에게 들켜서는 가늘게 웃는 상처의 얼굴.

 

                        3

아들아, 너는 오늘도 떠나는구나.

무한정의 하늘을 향해 떠나는구나.

날아라, 피터 팬같이 밤에는 별 사이를 지나서

서로 헐뜯지 않고, 서로 칭찬하는 나라,

끼리끼리 좋아하는 이론의 나라가 아니고

너그러운 나라, 따뜻한 마음의 나라를 보아라.

비가 억수로 퍼붓는 밤에도, 언제나

꿈의 피터 팬은 날을 수 있어야 한다.

겨울의 창밖도 보아라, 네 나라가 보인다.

 

춥고 어둡고 지쳐서 기운이 다 빠지면

그래, 이 아비가 비밀 하나를 가르쳐주마.

아비가 어릴 적 가슴조이며 주저하기만 하던

부드럽고 착하던 명륜동, 혜화동의 처녀들,

창신동이든 창천동이든, 나도 모르는 강남의 어디든

그 처녀들 이제 다 시집가서 풍성히 키우는 딸들,

그렇게 잘 자라는 처녀를 꼭 하나 잡도록 해라.

애걸을 해서라도, 평생을 지내자고 해라,

같은 핏줄이라는 게, 풍습이라는 게, 그게 참, 무언지.

그래야 네 눈에 보이는 외로움을 우선 가시게 된다.

그러나 나라보다 더 크고, 넓고, 푸른 곳이라며

하늘을 향해 다시 날아오르는 외로운 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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