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辭尹白下 - 村女 溪路暮煙起 斜陽白鷺前 君家去漸遠 歸家不忍鞭 - 시골 여자 시냇가의 길에 오르는 저녁연기 해오라기 날으는 해질녘이다 떠나온 님의 집이 차츰 멀어가나니 돌아오는 말에 차마 채찍질 못한다 2022. 5. 10.
인생 - 최영미 달리는 열차에 앉아 창 밖을 더듬노라면 가까운 나무들은 휙휙 형체도 없이 도망가고 먼 산만 오롯이 풍경으로 잡힌다 해바른 창가에 기대앉으면 겨울을 물리친 강둑에 아물아물 아지랑이 피어오르고 시간은 레일 위에 미끄러져 한 쌍의 팽팽한 선일 뿐인데 인생길도 그런 것인가 더듬으면 달음치고 돌아서면 잡히는 흔들리는 유리창 머리 묻고 생각해본다 바퀴소리 덜컹덜컹 총알처럼 가슴에 박히는데 그 속에 내가 있고 네가 있고 아직도 못다 한 우리의 시름이 있는 가까웠다 멀어지는 바깥세상은 졸리운 눈 속으로 얼키설키 감겨오는데 전선 위에 무심히 내려앉은 저걸, 하늘이라고 그러던가 2022. 4. 29.
기다림 - 피천득 아빠는 유리창으로 살며시 들여다보았다 뒷머리 모습을 더듬어 아빠는 너를 금방 찾아냈다 너는 선생님을 쳐다보고 웃고 있었다 아빠는 운동장에서 종 칠 때를 기다렸다 2022. 4. 28.
삼십대 - 심보선 나 다 자랐다, 삼십대, 청춘은 껌처럼 씹고 버렸다, 가끔 눈물이 흘렀으나 그것을 기적이라 믿지 않았다, 다만 깜짝 놀라 친구들에게 전화질이나 해댈 뿐, 뭐하고 사니, 산책은 나의 종교, 하품은 나의 기도문, 귀의할 곳이 있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지, 공원에 나가 사진도 찍고 김밥도 먹었다, 평화로웠으나, 삼십대, 평화가 그리 믿을 만한 것이겠나, 비행운에 할퀴운 하늘이 순식간에 아무는 것을 잔디밭에 누워 바라보았다, 내 속 어딘가에 고여 있는 하얀 피, 꿈속에, 니가 나타났다, 다음 날 꿈에도, 같은 자리에 니가 서 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너랑 닮은 새였다 (제발 날아가지 마), 삼십대, 다 자랐는데 왜 사나, 사랑은 여전히 오는가, 여전히 아픈가, 여전히 신열에 몸 들뜨나, 산책에서 돌아오.. 2022. 4. 27.
외로운 아들 - 마종기 1 아비는 코리아에서 대학을 나오고 스물 몇 살, 의학 연구랍시고 미국에 왔지. 결혼을 하고 행사처럼 네가 난 거지. 너는 송아지 노래도, 나비야 노래도 잘하더니 학교에 들어가자 일년도 못 되어 한국말을 끝내버렸어. 친구들 못 알아듣는 말에 한동안 당황해하더니.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중에 아비는 왔다갔다 한글 학교도 만들고 한글 교사를 초빙해 고개도 많이 숙였지만 너는 뜻도 모르고 읽고, 외마디 소리나 할 뿐, 네 할아버지가 쓰신 동화 한편은커녕 이 아비의 못난 시 한 줄도 이해 못 하면서 학교에서는 인기 있고 똑똑한 동양계 미국인. 고등학교 졸업 때는 이 아비도 자랑스러웠지. 천여 명 학생과 학부형의 극장 무대에서 졸업생 답사를 읽으면서 농담까지 지껄이고 난데없이 학교 밴드는 아리랑을.. 2022. 4. 26.
추신(追伸) - 홍성란 당신이 나를 보려고 본 게 아니라 다만 보이니까 바라본 것일지라도 나는 꼭 당신이 불러야 할 이름이었잖아요. 2022. 4.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