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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삼이야기

by 꿈의 페달을 밟고 2023. 4. 17.

  각성했을 때, 몸속으로 무언가가 들어오고 있었다. 아주 작은, 건드리는 순간 파사사 하고 흩어지는 것들이었다. 몸의 가장 끝에 난 구멍에서 짧은 줄이 빠져나가 미끄덩하고 딱딱한 것에 묻어있는 것을 빨아들이면 신기하면서도 조금은 익숙한 느낌이 났다. 그 느낌이 좋았다. 다시 한번 느끼고 싶었다. 구멍으로 힘을 주었더니 더 많이 들어왔다. 조금 더 세게 했더니, 몸통이 끌리면서 따라왔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나는 그렇게 움직이는 방법을 익혔다. 소리도 없이 고요한 곳에서 나는 끝없이 먹었다. 앞구멍을 좀 더 다양하게 다룰 수 있게 됐고, 덕분에 훨씬 더 빨리 움직이는 즐거움도 누렸다. 열심히 먹고 움직이다 보면 앞구멍의 반대쪽 끝에 있는 뒷구멍에서는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먹었는지 보여주는 흔적이 꽤 괜찮은 느낌을 내며 빠져나왔다.

  내가 이곳에 있는 게 나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 흔적 때문이었다. 앞구멍에 흔적이 들어왔다. 내가 아닌 다른 누가 분명히 있다. 계속 다른 이가 어디에 있을지 골몰하며 쉬지 않고 움직였다. 나는 이 세계에 혼자가 아니라는 것 하나로도 끝없이 찾아 돌아다닐 힘이 났다. 전에 마주쳤던 흔적을 다시 발견했을 땐 드디어 세상을 다 돌아봤다는 생각에 즐거웠다. 머리 위로 끝없이 느껴오던 일정한 진동이 무엇이었는지 알아내지 못한 것만 빼면 완벽했다.

  얼마나 움직였는지 모르겠다. 갑자기 첨벙 소리를 내며 거대하고 빠른 괴물이 세계로 들어와 나를 들어 올렸다.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충격으로 인해 몸 전체에 짧은 가시가 돋고 그 끝에서 눈알이 튀어나왔다. 오목하고 둥그런 것 속에 투명한 것이 고여 있고, 그 속에 앞뒤가 구멍인 생명체가 보였다. 나의 동족이었다. 괴물이 나의 세계에 침투해 빠르게 움직이면 투명한 것이 촥 소리를 내며 밖으로 퍼지기도 했다. 동족 중 몇몇은 쓸려 나와 당황해 뻐끔거리기만 했다. 그들 중 아무도 나처럼 눈을 뜨지는 못했다. 괴물은 당황한 나의 동족들을 다시 세계 안으로 집어넣었다. 나의 세계가 저렇게 작았던가. 괴물들의 세상에는 무한히 넓은 줄 알았던 나의 세계와 똑같은 것들이 줄 지어 서 있었다.

  괴물에게는 네 개의 기다란 줄기와 하나의 짧은 줄기가 몸통에 이어져있었다. 굵고 짧은 줄기는 나와 비슷해 보였다. 차이가 있다면 그 줄기에는 구멍이 여러 개라는 것이었다. 모두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두 개의 구멍이 나란히 자리 잡았는데, 유일하게 짝을 가지지 않은 구멍이 계속 열렸다 닫혔다. 그 속으로는 물컹거리는 기둥이 꿈틀거렸다. 괴물의 줄기는 계속 나를 거머쥐고 있었다.

  괴물의 줄기가 부러웠다.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줄기가 나에게도 있었더라면 이렇게 무력하지 않았을 텐데. 그랬더라면 나도 동족을 구했을 텐데. 괴물은 짧은 줄기 가까이 가져가 한참을 살피더니 엄청난 속도로 이동해 더 큰 괴물을 불러왔다. 아무래도 내가 볼 줄 안다는 알아챈 모양이다. 나는 눈을 감고 다시 안락한 세계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한 번 떠진 눈은 다시 감기지 않았다.

  괴물들은 내가 온 세계보다 좁고, 바깥 세계가 다 보이는 투명한 곳에 나를 넣었다. 바깥 세계는 넓었다. 저 멀리에는 괴물이 더 있었다. 희고 평평한 판 위에서 나보다 몇 배는 큰 동족을 토막 내고 있었다. 나는 끝없이 지켜봤다. 괴물이 그 유일하게 짝이 없는 구멍으로 동족의 몸을 잘라 더 멀리 있는 괴물에게 먹였다. 내가 버둥거려 봤자 저 괴물들을 당할 수 없다고, 나와 내 동족을 구하는 방법은 없다고, 감지 못하는 눈이 다 보여주었다. 몸의 모든 구멍에서 괴로움이 터져 나왔다. 마지막까지 달려있던 눈은 눈구멍에서 내장이 튀어나와 눈알이 떨어지는 모습을 차분히 지켜보고는 툭 떨어졌다. 완벽한 고요가 찾아왔다.

 

  “여보, 이거 좀 봐.”

  “왜, 바빠 죽겠는데 돕지는 않고.”

  “갑자기 내장을 죄다 토하고 죽어버렸어.”

  아줌마가 유리병을 들여다보다 표정을 찌푸렸다.

  “바닥에 깔린 이거…… 설마 눈알이야?”

  아저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어민신문>을 손에서 내려놨다. 해삼 양식에 관한 회의적인 기사가 일면을 차지하고 있었다. 아줌마는 말없이 아저씨에게 음식물쓰레기 봉지를 건네고 대야 안에 있던 손가락만 한 해삼을 모두 잘게 썰어 손님에게 나갈 매운탕에 골고루 집어넣었다.

 

 

- 짧은 꽁트 안에 두 가지 상반된 시점을 담아낸 것이 좋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작위적인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군요. 해삼의 시점으로 쓰인 앞부분이 좀 더 세밀하게 묘사되었다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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